18세기 영국 미술1
근대 영국의 지배적 사고방식이었던 경험론은 미술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술은 감각이나 상상력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그런데 합리론은 감각과 상상력을 참된 지식을 얻는 데 부정적, 수동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술의 일차적인 목적은 즐거움이다. 현실의 감각적 즐거움은 직접적인 아름다움에서 온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거기에 아무런 결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주는 감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회화에서 자연이든 인물이든 이상화된 구도와 형태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모습을 직접 반영하려는 노력이 확대된다.
예술의 목적을 개인의 감각적 즐거움에 두는 관점은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과 연결되면서 상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의 가능성을 열었다.
경험론 미학이 실제 미술 작품에 가장 특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이른바 '취미론'이라는 발상이다. 창작 과정이나 작품 감상에서 경험적 감각에 기초한 취향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목적에 구속받지 않고, 미술을 통한 개인의 즐거움을 실현하며, 개인이 가지고 있는 미적 감각을 발휘하는 장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근대 미술은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근대적 특징을 제공한다.
17세기까지 영국 미술은 독자적 발전을 보여 주지 못했다. 유럽 대륙의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에 경도되어, 이탈리아나 프랑스 대가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다.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사회경제적 힘이 비약적으로 확대되면서 윌리엄 호가스, 조슈아 레이놀즈, 토머스 게인즈버러 등 독자적인 영국 미술의 등장을 알리는 화가의 작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미술은 아직 이탈리아나 프랑스 바로크 미술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호가스는 미와 선의 일치라는 전통적 사고의 틀 내에서 작업했고, 레이놀즈는 고전주의적 회화 전통을 기반으로 했다. 그렇지만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후 영국 미술의 독자적 특징에 해당하는 새싹들이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근대 경험론 철학의 근원지답게 영국 미술은 현세의 삶을 담는 데 적극적이었다. 일차적으로 신화나 종교에서 벗어나 인간의 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현세적이다. 마치 일상생활의 한순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게인즈버러의 <앤드루스와 그의 아내>는 부부가 개와 함께 사냥을 나왔다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에는 노랗게 익은 곡식이 쌓여 있고, 중간 부분에는 농지가 펼쳐져 있다. 밭과 언덕이 만나는 곳에 양을 키우는 목장도 보인다. 그 뒤로 흐릿한 산등성이와 뭉게구름이 보인다.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는 가을 어느 날, 부인과 가볍게 산책을 겸해서 나온 사냥인 듯하다. 성스러움이든 정신성이든 특별히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현실의 모습 그대로를 옮겨 놓은 그림이다.
영국 예술가들은 단지 현세적 소재를 다루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현실 주제와 생생한 문제의식을 회화로 표현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호가스는 현실의 부조리나 부패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 기준을 넘어서는 근대적 싹이 자라났다. 그는 도덕적으로 문란한 사회상을 풍자화를 통해 고발하기도 했다. 특히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인한 낭비를 주된 표적으로 삼았다. 연작 방식을 이용해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장면을 연출하면서 효과를 극대화했다.
<결혼 계약>은 당시 논란이 되던 '유행 결혼'을 그린 연작 중 하나다. 신랑과 신부 가족이 결혼을 위한 사전 계약서를 쓰기 위해 모여 있는 광경이다. 당시 영국의 상류사회에서 부와 명예의 맞교환을 전제로 빈번하게 일어났던 정략결혼을 다뤘다.
호가스는 자신의 작업을 극작가나 연출가의 수법에 비교하곤 했다.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동작, 복장, 소품 등을 통해 의미를 전달한다. 몇 가지 점에서 근대를 향한 발걸음도 보인다. 중세 미술이나 바로크 미술이 종교적 이상을 실현해야 할 덕으로 삼았다면 호가스는 현실 세계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사치와 부패한 정치를 표적으로 한 풍자화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테마에 가깝다. 또한 구도와 비례의 균형, 극적인 명암 대비 등 기존 미술의 고정 양식에서 벗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하고 생생한 표현을 중시했다. 이성적 조화를 넘어서 감각적 표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근대 회화 형식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호가스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미술품 구매 능력을 갖추고 있는 귀족이나 시민 계급의 일상으로 한정된 것도 아니었다. 도시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민의 일상도 회화 소재로 등장한다. 호가스는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데 계층을 가리지 않았다. <진 거리>는 의회의 합의에 따라 규정된 선악의 기준을 회화를 통해 보여 준다. 영국 의회는 18세기 중반에 진 종류의 독한 술을 법으로 불법화했다. 이 그림은 호가스가 '진 법령'을 지지하면서 그린 판화다.
호가스는 두 개의 그림을 비교해 그렸는데, <맥주 거리>라는 작품에서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선함의 상징으로 대비시킨다. <맥주 거리>에서는 활기차게 일하고, 그림을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건강한 일과 사랑, 예술이 꽃핀다. 반대로 <진 거리>는 악 그 자체다. 무능함과 추악함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게을러져서 가난에 찌들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으며 싸움으로 소란스럽다.
18세기 후반기로 가면서 도시 서민의 담담한 일상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링컨 대성당>을 보면, 제목은 대성당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골목의 사람들이다. 아예 대성당은 다른 건물에 가려 윗부분만 살짝 보인다. 전면에는 허름한 건물이 즐비하다. 맨 앞에 온갖 종류의 그릇을 닦고 말리는 사람이 보인다. 건너편 정육점 주인은 따분해 보이고 손님은 상품을 구경하는 중이다. 그 주변으로 마차를 모는 마부, 짐을 나르는 사람, 집수리하는 사람 등이 있다. 동네 뒷골목에서 빠질 수 없는, 여기저기 뛰노는 강아지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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