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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

서양미술의 역사-비판적 리얼리즘, 추상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by 매일나 2022. 6. 28.

바실리 칸딘스키

비판적 리얼리즘 

 비판적 리얼리즘은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 막심 고리키에 의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주로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창작 원리라면, 비판적 리얼리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상 자본주의 생활 형태에 대한 비판을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전개하는 창작 방법을 일컫는다. 직접적인 사회주의 경향성을 지니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르주아 계급의 탐욕과 부패를 비판하고 몰락의 가능성을 반영한 작품을 선보였다. 

 

 서유럽의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의 선구자 케테 콜비츠의 <밭 가는 사람들>은 소외된 노동으로 인해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 준다. 그림에서 두 농부가 쟁기를 끌고 있다. 어깨에 끈을 연결하여 소도 힘든 쟁기질을 사력을 다해 하는 중이다. 앞의 농부는 묵묵히 자기 몸으로 갈아야 할 밭을 응시한다. 뒤편의 농부는 이미 기력을 잃었는지 힘을 짜내는 기색이 역력하다.

 죽을 힘을 다해 밭을 갈지만 정작 대부분의 경작물은 땅 주인의 몫이다. 이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가족의 생계도 책임지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다. 자유로운 의지나 의식은커녕 자신이 생존을 위한 노동 수단으로 전락해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일 것이다. 거의 땅에 붙어 있는 두 농부의 모습은 이미 땅의 일부인듯하다. 

 

 1870년에 결성된 이동파는 러시아 비판적 리얼리즘의 상징이었다. 미술이 귀족의 전유물로 머무는 현실을 거부하고 민중에게 작품 감상의 기회를 주고자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며 전시회를 열어서 이동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동파는 민중적 시각에서 농민, 노동자의 삶은 물론이고 역사적 사건을 해석해 그림으로 풀어냈다.

 

 프랑스 화가 장 루이 에르네스트 메소니에는 혁명 사상을 옹호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네덜란드 풍속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나폴레옹 회고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리케이드>는 비판적 리얼리즘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1848년 파리의 노동자 봉기 현장을 담은 그림이다. 농업 위기와 경제 공황, 정치적 혼란을 겪는 와중에 2월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다. 정부군과 노동자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두고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때 희생된 사람이 1만여 명을 넘었고, 파리 동부 지역은 며칠간 시체로 뒤덮였다. 

 

 콜비츠의 <봉기>는 억압적인 현실을 지양하려는 민중의 힘을 보여 준다. 저마다 낫이나 도끼, 꼬챙이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굶주림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절규하는 표정을 볼 수 있다. 뒤편으로는 봉기에 의해 불타는 성이 보인다. 대열의 선두에 선 사람이 올린 깃발 아래로 봉기를 상징하는 여신을 그렸다.

 콜비츠의 또 다른 작품 <폭동>은 도시 직조공 저항하는 모습을 담았다. 직조공들이 거리 행진을 거쳐 기업주의 저택에 도착한 모습이다. 이 작품은 콜비츠의 경지에 오른 사실주의적 표현 기법이 눈길을 끈다. 그녀는 정형화된 표현에 집착하는 아카데미즘, 부르주아 취향의 아틀리에 예술을 넘어 삶의 현장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죽음과도 같은 노동에 찌들 대로 찌든 모습, 조금의 과장도 허세도 없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다. 리얼리즘은 관념의 소산이 아니라 현실의 소산이다.

 

추상주의

 1910년대에는 예술가의 주관성을 대폭 강화한 추상주의가 나타난다. 서유럽에서는 몬드리안처럼 기하학적 경향이 강했다면, 러시아에서는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표현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띈다. 초기에는 감정을 표현주의적 방식에 담아서 표현하는 '뜨거운 추상'이, 후기에는 날카로운 이지적 공간에 초점을 맞춘 '차가운 추상'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난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은 기쁨>은 뜨거운 추상, <콤포지션>은 차가운 추상에 해당한다. 차가운 추상에 있어서는 몬드리안처럼 선, 면, 색을 통한 기하학적 공간 분할이 두드러지지만 몬드리안과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몬드리안의 경우 사각형에 가까운 면 분할로 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면, 칸딘스키는 날카로운 삼각형을 비대칭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훨씬 긴장감과 역동성을 더한다. 

 

 1917년 10월 혁명을 전후해 러시아 미술계는 미래주의, 입체주의, 추상주의, 구성주의 등 이른바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만개하며 예술적 에너지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당시 기존의 낡은 질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가 솟구치는 상황에서 이에 부응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예술적 욕구와 실험이 분출했다. 

 

 러시아 추상주의 회화의 발전은 레닌의 적극적 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레닌은 아방가르드적 예술 사조에 관대했다. 정치 영역만이 아니라 예술에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태도를 지녔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칸딘스키를 비롯하여 실험적 예술을 지향하는 작가들이 러시아로 대거 몰려들었고 러시아 미술의 부흥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1924년 레닌이 병으로 사망한 후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소련의 미술 정책은 큰 변화를 겪는다. 스탈린은 매우 엄격한 예술 검열 정책을 시행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 예술의 기본 방법이며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정확하게 역사적 구체성으로 그릴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면서 여기에서 벗어나는 미술은 가차 없이 탄압했다. 탄압 속에서 칸딘스키를 비롯한 많은 미술가들의 서유럽 망명이 줄을 이었다. 인상주의 미술 작품조차 미술관에서 철거되는 상황에서 추상주의 회화가 설 자리는 더욱 없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혁명 발전의 기치와 영웅적인 인물 묘사를 중시했다. 민족주의, 당원주의, 이념주의를 표방했는데, 모든 예술 작품은 지역 고유 사상 및 거주민과 긴밀히 연계할 것, 공산당 특징을 반영할 것, 사회주의 이념과 사상, 태도를 표명할 것이 요구됐다. 표현 기법에서는 표현주의, 추상주의, 구성주의 등의 배척과 전통적 사실주의 묘사를 강요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강인한 노동 영웅의 모습에 주목했다. 한 치의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오직 주어진 과제에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강철 같은 민중의 모습을 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개인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현실의 개인이라기보다는 소비에트 구성원이 가져야 할 이상적 덕목을 체현한 집단의 일원일 뿐이다. 이를 위해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표정은 언제나 밝고 희망에 차 있어야 했다. 신체는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불끈 솟아오른 근육에서 풍기는 강인함으로 가득해야 했다. 항상 사회주의를 향한 소비에트 정신과 기상을 간직한 전형적인 노동자와 농민을 묘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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