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 미술
표현주의 미술은 대공황과 세계대전으로 얼룩진 20세기 초중반의 암울한 사회 배경에 영향을 받으며 여러 형식으로 나타났다. 불안과 절망의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현실이 예술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절망과 죽음을 매개로, 세계와 연결된 예술가 개인의 주관적 정신성과 직관을 강조하는 경향이 확대됐다. 이는 사실의 충실한 '재현'보다 사물이나 사건에 의해 야기되는 주관적 감정과 반응을 직관에 의존하여 '표현'하는 표현주의 미술로 이어졌다. 특히 강렬한 색이나 격렬하고 거친 붓질을 통한 표현 방법으로 내면의 출렁이는 감정을 드러낸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에드바르 뭉크의 표현 방법과 회화적 메시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뭉크의 <절규>는 불안이나 절망에 동화되는 감정을 자아낸다. 그림을 볼 때면 덩달아 초조해지거나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울렁거린다. 날카로운 비명으로 가득할 것만 같다. 엄습하는 불안이 자연조차 일그러진 상태로 나타나게 한다. 비슷한 장면을 담은 그림만 50여 점에 이를 정도니 불안과 절망이 얼마나 깊숙이 뭉크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불안>도 인간에게 내재된 불안 감정을 드러낸다. 그림을 보면 불안은 특정 개인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앞의 소녀는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듯 불안에 떨고 있다. 하지만 불안에 떠는 모습은 뒤편의 신사, 그리고 뒤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다. 또한 하늘과 땅 등 자연만 있을 뿐이어서 인간 자신 이외에 다른 불안 요인은 찾아볼 수 없다. 스스로에게서 비롯되는 불안이기에 모든 인간은 뭉크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불안을 숙명처럼 일상에서 짊어진다.
뭉크의 작품들에는 일상적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화가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하다. 뭉크는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죽음이 주는 절망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나의 삶은 죽음과 함께한다.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할아버지... 그들은 죽고 스스로를 죽였고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났다. 왜? 왜 사는 것인가?" 죽음 앞에서의 불안이 뭉크를 삶과 예술에 파고들도록 인도한 것이다.
표현주의 미술-다리파
표현주의 중 다리파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를 비롯한 네 명의 독일 건축학과 학생이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 역할:을 자임하며 다리파라는 미술가 그룹을 결성하면서 시작된 흐름이다. 그들은 19세기 말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괴되는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암울하게 그려 냈다.
키르히너의 <베를린 거리>는 산업화가 만들어 낸 대도시에서 실존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냉소적 시선으로 담아냈다. 르누아르를 비롯해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다룬 파리의 풍경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키르히너의 그림에는 고독과 차가운 기운이 감돈다. 베를린 거리를 걷는 도시인은 마치 가면을 쓴 듯 아무런 표정이 없어서 내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강렬한 색의 사용, 격렬하고 거친 붓질 등이 삶 속에서 느끼는 날카로운 긴장감을 드러낸다.
에밀 놀데의 <황금 송아지를 에워싼 춤>은 새로운 우상에 정신을 빼앗기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했다. 조화를 거부하는 듯한 강렬한 색조 대비와 거친 형태가 키르히너에 비해 훨씬 과감해서 방향을 잃고 요동치는 내면의 느낌이 보다 두드러진다. 그림 속 사람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광란에 가까운 춤을 춘다. 사람의 영혼을 앗아갈 정도로 강력한 우상은 무엇이었을까? 키르히너처럼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허구적 산업화와 도시화일까? 아니면 안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기 내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일까?
표현주의 미술-빈 분리파
표현주의 중 빈 분리파는 인간의 신체를 왜곡하여 굴절되어 있는 자아를 표현한다. 색채 대비는 다리파에 비해 훨씬 온건해서, 야수파의 영향에서 확실히 벗어났음을 보여 준다. 강렬한 원색보다는 중화된 색의 대비를 통해 한결 편안한 느낌을 준다. 내용상의 특이한 점은 사랑과 성에 관한 특별한 관심에서 찾을 수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에로티시즘을 미술의 독자적 영역으로 확립했다.
특히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을 대표하는 작가다. 물론 도발적 성격으로는 실레를 따라가기 힘들다. 두 사람은 에로티시즘이라는 측면에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선구자는 클림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현 방식은 사뭇 다르다. 클림트가 금기의 경계선에 있었다면 실레는 금기의 경계선 너머로 치닫는다. 클림트는 인물의 표정이나 묘한 분위기를 통해 관능을 묘사하지만, 실레는 흔히 생각하는 교태의 표현을 넘어서 노골적이고 생생한 포즈의 인물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클림트가 감춤의 미를 추구했다면 실레는 드러냄의 미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표현주의 미술-청기사파
표현주의 중 청기사파는 다른 표현주의 그룹에 비해 훨씬 더 단순하고 추상화된 화면을 구사한다. 이는 칸딘스키를 비롯해 청기사파의 중심 인물이 지닌 정신적 태도와 직결된다. 그는 물질적 요소가 쓸데없이 느껴지고 정신을 직접 표현하려는 경우, 순수한 추상 형태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화와 추상화 과정을 통해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어도 색채가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청기사파 화가들은 전통적 표현 방식으로는 현대인의 정신을 표현하기에 많은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칸딘스키가 준 영감을 수용하여 파격적이고 독특한 화면을 펼쳤다. 단순하고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 정신적 가치를 드러내는 순수 추상회화를 개척하고 이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파울 클레의 <세네치오>는 어릿광대의 얼굴을 단순한 면과 색을 통해 묘사했다. 다른 표현주의 경향에 비해 훨씬 더 평면적이고 기하학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그는 회화가 사물의 재현을 거부하고 내적인 본질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색을 통한 내면의 접근을 중시했다 "색은 나를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나를 영원히 소유하고,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순간만큼은 색과 내가 하나라는 행복한 느낌이다. 나는 화가다." 클레는 선, 색면, 공간이 회화의 기본 요소고, 이를 통해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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