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
표현주의 미술, 특히 청기사파에서 시초가 나타난 단순화와 추상화로의 방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캔버스에서 사물이나 인간의 형태를 제거하는 '앵포르멜' 적 추상표현으로까지 나아간다. 앵포르멜은 부정형 또는 비정형, 즉 정해진 형태가 없다는 의미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형태를 제거함으로써 산업화와 전쟁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회적, 정신적 불안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신과 예술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시대 상황과 연결 고리를 갖고 발생하는 불안, 소외, 부조리에 대한 자각과 정신적 초월을 통한 극복을 지향한다. 추상표현주의는 감각적 형태를 제거함으로써 화가 개인의 내면으로 다가선다는 점에서 매우 지적인 미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미술 비평가인 해럴드 로젠버그에 의해 이론적 토대를 제공 받는다. 로젠버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잭슨 폴록과 일렘 드 쿠닝 등에 의해 시도된, 그림의 형식보다 그리는 행위를 중시하는 경향을 '액션 페인팅'으로 부르며 "캔버스는 표현보다 행위를 하는 장으로서의 투기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며 옹호 입장에 선다. 작품보다는 행동에 주목함으로써 작가 개인의 실존적 고투를 통한 자아 표출에 의미를 부여했다.
폴록은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초기에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다가 극단화된 추상으로 나아가는 추상표현주의의 새 장을 열었다. 이젤을 세우고 그리는 전통적 방법을 거부하고 '폴록의 작업 광경'에서 볼 수 있듯이 캔버스를 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킨 뒤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붓이 아니라 막대기나 나이프로 물감을 다뤘고 때로는 모래, 유리 조각을 비롯한 다양한 이물질을 섞어 효과를 내기도 했다.
폴록은 100~200호 이상의 대형 캔버스를 주로 사용했는데, 그만큼 작가가 작업한 행위가 캔버스 안에 누적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작업 일지에서 "내가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림과 친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능해진다."라고 했다.
미술 비평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로젠버그는 고작 자전적 의미 밖에 없는 '행위'의 잔여물을 왜 전시, 감상, 구입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 작품 자체의 형식에 비중을 두는 관점이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미술은 단순히 실존적 행위를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작품 자제로서 순수하고 독창적인 내용을 확보해야 한다. 그는 전체적으로 등질적 특징을 지닌 색과 평면성을 통해 순수한 정신에 도달할 수 있다며 추상표현주의에서 색면 추상의 방향성을 강조했다.
색면 추상은 넓고 단순한 색면을 중시한다. 그린버그는 평면성과 단순성이 회화의 순수성과 독자성을 실현한다고 보았다. 전통적 회화는 하나의 그림으로서 보기보다는 그 안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를 먼저 보게 된다. 하지만 모더니스트 회화는 극도의 단순성으로 인해 하나의 그림으로서 먼저 보게 된다. 극도의 단순성을 실현할 방법은 선과 면, 그리고 단일하게 펼쳐진 색이다.
마크 로스코의 <No.14>는 색면만으로 충분히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실현한 작품이다. 그림은 검은색과 주황색을 사용해 위아래로 나뉜 두개의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과 면의 경계는 뚜렷한 선이 아닌, 두 자기의 색이 스며드는 방식을 사용하여 구분이 모호하다. 밝은색이 주를 이루는 초기 작품이 비해 후기로 갈수록 검은색을 비롯해 어두운 색조를 중심으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로스코는 색과 면을 통해 오직 정신에 다가서고자 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검은색을 즐겨 사용했는데, 검은색이 깊은 불안과 고독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 주기에 적합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바넷 뉴먼의 <하나1>도 기교를 철저히 배제한 평면성과 단순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로스코와 비슷하다. 로스코가 주로 색과 면을 통해 캔버스를 위아래로 구분한다면 뉴먼은 좌우로 나눈다. 또한 로스코가 선의 색이 스며들어 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면 뉴먼은 상대적으로 구분이 더 분명한 색띠를 이용했다.
뉴먼은 단순한 색과 면을 중심으로 한 추상표현주의가 단순화된 이미지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그는 수직의 선으로 나타나는 '틈'을 어떠한 위계질서를 담은 수직선이 아닌, 애초에 '하나임'에서 균열이 생겨, 열어서 펼쳐지는 '지퍼'라고 불렀다. 그의 말대로라면 세계 안에서 주관과 객관의 분열 상태로 내던져진 현존재의 상황에 상당히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지퍼는 분리만이 아니라 통합의 기능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주관-객관의 분열을 넘어 통합으로 나아가려는 지향점을 담고 있다.
신표현주의
20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표현주의 내에서 다시 형상을 복구하는 방향의 새로운 흐름으로 신표현주의가 나타났다. 20세기 중반을 주름잡은 추상표현주의는 추상적 형태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이 과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미술이 구상과 서술에서 벗어나는 길은 추상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신표현주의 화가들이 보기에는 또 하나의 길, 즉 형상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신표현주의의 선구자 역할을 한 프랜시스 베이컨 역시 이처럼 '추상적 형태로 향하는 길'과 '형상으로 향하는 길' 가운데 형상의 길에 주목했다. 예술 언어가 감각의 언어일 때 진정으로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이 형상이기 때문이다. 형상의 길은 재현에 집착하는 구상과는 다른 방식이다. 미술에서 신체는 자신을 향해 작업하기에 대상인 동시에 주체다. 감각을 통해 색이나 모양으로 이미지화되어 그려진 신체는 본래의 신체와는 별개의 기호로 나타난다.
베이컨의 삼면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도를 위한 세 개의 습작>은 왜곡된 신체를 통해 신체의 근원, 나아가서는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도록 자극한다. 그림을 보면 등장인물의 기관, 특히 얼굴에 집중된 감각 기관이 흐려져 있다.
삼면 각 인물의 머리는 '형상의 길'이 구상 방법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확인시켜 준다. 왼쪽에서 중앙을 거쳐 오른쪽으로 가면서 얼굴의 사실적 특징을 구성하는 눈, 코, 입, 귀가 점차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머리만 남는다. 베이컨은 신체를 변형시키고 형상과 머리라는 물질을 통합시킨다. 그러므로 화가에게 사실이란 대상이 아닌 감각이다.
이후 20세기 후반에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신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정치적인 권위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담을 작품을 자주 내놓는다. 바젤리츠는 <연단 위의 레닌>처럼 기존의 사회주의를 모티브로 한 '러시안 페인팅' 연작 작업을 했다. 구동독 출신인 그가 어린 시절 보고 자란 러시아 그림과 사진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바젤리츠는 다른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를 거꾸로 그림으로써 전통적인 시각도 동시에 뒤집어 버린다. 또한 색점으로 흩어진 표현방식으로 형상을 흩뜨려 놓는다.
화가는 색점 묘사와 거꾸로 된 그림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주제 의식을 흐릿하게 만들고, 전통적 권위에 의문을 품게 한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조롱을 통해 권위에 도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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