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이탈리아
무역을 통해서 동양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던 베네치아는 르네상스 양식, 즉 건축에 고전적인 형식을 적용한 브루넬레스키의 방식을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보다 늦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양식을 받아들인 뒤에는 새로운 경쾌함과 따뜻함이 기존 양식에 더해져서 근대의 다른 어떤 건축 양식보다 더욱 밀접하게 헬레니즘 시대의 큰 상업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크의 장대함을 연상하게 해 주고 있다. 이 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 중의 하나는 산 마르코 성당의 도서관이다. 이 건물은 피렌체 출신의 야코포 산소비노라는 건축가가 지었다. 산호초로 둘러싸인 해변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화려한 베네치아의 밝은 빛에 어울리도록 완벽하게 지었다. 활기 넘치는 도리아식 기둥을 가지고 있는 건물 아래층은 가장 전통적인 고전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산소비노는 콜로세움에서 볼 수 있는 건축의 법칙을 많이 따르고 있다. 그는 이와 동일한 전통을 고수해서 이오니아식으로 건물 위층을 꾸밀 때도 난간을 얹고 그 위에는 조각상을 배열한 아티카를 갖추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이 건물에 난간과 꽃 장식과 조각상들을 이용하여 고딕 베네치아 건축의 정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트레이서리를 연상시키는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피렌체 미술
피렌체의 화가들은 색채보다는 소묘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그림이 색채 측면에서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채색하기 전에 원근법이나 구도로써 통일된 구성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를 그림 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가 그의 말년인 1505년에 신단에 그린 작품 <성모와 성인들>을 보면 색채에 대한 그의 접근법이 매우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그림이 특별히 화려하거나 밝아서가 아니라,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는 옥좌가 놓인 황금색의 빛나는 벽감에서 넘쳐흐르는 따뜻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벨리니는 그림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이 단순한 대칭적인 구도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성모와 성인들의 전통적인 모습을 그 신성함과 위엄을 훼손하지 않은 채 사실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식도 알고 있었다.
베네치아 미술
중부 이탈리아의 고전기 화가들이 완전한 화면 구성과 균형 잡힌 구도로써 그들의 그림 속에 새롭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색채와 빛을 행복하게 사용하면서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화가 조르조네는 바로 이런 영역에서 가장 혁명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조르조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고 그의 진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겨우 다섯 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만으로도 그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이상하게도 수수께끼와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의 하나인 <폭풍우>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어떤 고전 작가나 고전 작품을 모방한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한 장면을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 베네치아 미술가들은 그리스 시인들과 그들이 추구했던 작품에서 매력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원의 사랑을 다룬 소박하고 서정적인 이야기나 비너스와 요정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좋아했다.
베네치아 화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티치아노는 알프스 남부의 카도레에서 출생하고 99세에 생을 마감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긴 생애 동안 그는 미켈란젤로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해진다. <성모와 성인들과 폐사로 일가>를 보면 그의 작품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모를 그림의 중심에서 옆쪽으로 이동시켰으며 두 성인을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제까지 없던 것이었다.
티치아노가 당시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그의 초상화의 매력을 이해하려면 <한 남자의 초상, 일명 '젊은 영국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젊은 영국인은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처럼 신비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꿈에 잠긴 듯한 눈동자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한 점 칠해 놓은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영혼이 담긴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다.
북부 이탈리아 소도시의 미술
미술가들이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방법의 발견을 위해 정진한 것은 베네치아와 같은 커다란 중심지에서만은 아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인 파르마에서도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16세기 초기의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감한 혁신가로 평가되었던 일명 코레조라 불린 안토니오 알레그리가 있었다. 코레조가 그의 대표작들을 그렸을 때 이미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는 사망했고 티치아노는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북부 이탈리아의 인근 도시에서 레오나르도 제자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명암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후대에 여러 화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완전히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이 명암법에 관한 것이었다.
<거룩한 밤>에서 키가 큰 목동이 이제 막 하늘이 열리면서 천사들이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께 영광을'하고 노래하는 환영을 본다. 이 작품을 처음 보면 배치가 기교가 없고 우연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빛을 던져 강조함으로써 전체 그림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욱 잘 활용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장면으로 목동과 함께 달려가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어둠 속을 비추는 '빛'의 기적을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인 것이다.
코레조 이후 수 세기 동안 반복해서 모방한 이 화가의 특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교회의 천장과 둥근 지붕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그는 아래의 본당에 있는 신도들에게 천장이 열려 있으며 그것을 통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빛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그의 능력으로 인해 그는 햇빛을 가득 받은 구름으로 천장을 메우고 많은 구름 사이로 천사들의 무리가 다리를 아래로 내려뜨리고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을 표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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