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장의 위대한 업적은 알프스 북쪽 지역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깊숙한 인상을 주었다. 고딕 양식의 작품도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위대하지만, 남유럽 지역의 걸작을 접한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술이 갑자기 구식이고 시대에 뒤처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들은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하는 해부학에 관한 지식, 그리고 고전 시대의 건축 양식에 관한 지식 등 세 가지를 이탈리아 거장들의 큰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16세기 초 독일의 건축
이탈리아 거장들의 이러한 지식의 영향은 유럽의 여러 미술가 중에서도 건축가들이 가장 난감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친숙하게 알고 있던 고딕 양식과 새롭게 부활한 고대 건축 양식은 모두 이론상으로는 대단히 원리적이고 일관된 것이었지만, 그 정신과 목적에서 서로 매우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스 북쪽 지역 국가의 건축에서 새로운 유행을 적용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새로운 유행은 이탈리아를 다녀온 귀족과 군주의 요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건축가들은 이런 새로운 유행을 표면적으로만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장식적인 모티프에 약간의 새로운 고전적인 형식만을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즉 건물의 본채는 그대로 고딕 양식으로 두는 것이 보통이었이다.
16세기 초 독일의 회화와 조각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는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화가와 조각가는 건축에서처럼 원기둥이나 아치와 같은 부분적인 형식만 받아들인다고 될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몇몇 화가들이 이탈리아에서 입수한 판화에서 인물의 형태나 포즈를 따라 하는 방식으로 만족해했다. 그러나 진정한 미술가라면 미술의 새로운 형식을 빈틈없이 이해하고 그 원칙과 형식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독일의 미술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평생 동안 미술의 장래를 위해서 이 새로운 원칙들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소년 시절부터 소묘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고 제단화와 목판화 삽화를 제작하는 큰 공방에서 수습 기간을 보냈다. 수습 기간을 마치고 그는 관례에 따라 장인으로서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여행길에 올라 우선 마르틴 숀가우어의 공방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 공방의 거장이 사망한 후였다. 그래도 그는 당시 그 공방의 운영을 맡은 숀가우어의 형제들과 상당한 기간을 함께 지내다 스위스의 바젤로 갔다. 여행 중에 그는 알프스 계곡의 풍경을 수채화로 옮기기도 하고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도 했다. 오랜 여행 후 공방을 열기 위해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 흡수하고 있었다. 그는 초기 걸작 가운데 하나인 성 요한의 계시록을 묘사한 대형 목판화에서 그가 위대한 미술가가 될 수 있는 깊은 감정과 대단한 상상력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의 작품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은 요한 계시록 12장을 그린 목판화 작품이다. 이 굉장한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뒤러는 영웅을 우아하게 표현하는 기존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리고, 용의 목을 찌르려고 온 힘을 다해 두 손으로 창을 잡고 있고 그 힘찬 몸짓이 화면을 가득 메우게 했다. 영웅의 주위에 있는 괴물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다.
뒤러는 허상의 환상적인 세계를 그리는 거장이었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습작이나 스케치를 보면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자연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을 모사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동판화와 유화로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더욱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고딕 미술이 거의 외면되고 있었으나 고전 미술의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인체 표현은 새로운 목적이었다. 뒤러는 인체에 관해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이러한 그를 지도해줄 이전 작품이나 영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법칙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는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고대인들의 표현과 비례는 약간 불명확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 비례 법칙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함으로써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비례를 찾기 위해 평생 동안 몰두하며 연구했다. 동판화 <아담과 이브>는 이러한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아름다움과 조화에 관한 모든 생각을 표현한 첫 번째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뒤러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이 동판화를 제작한 이듬해에 식견을 넓히고 남유럽 미술의 내밀에 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베네치아로 갔다.
그 시기 유명한 독일의 미술가 루카스 크라나흐는 처음부터 장래가 기대되는 화가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오래된 산 그림과 낭만적인 풍경의 알프스 북쪽 산기슭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집트로 피난 중의 휴식>은 이집트로 도피하는 성 가족을 그린 작품으로 그림 속의 성 가족은 숲이 우거진 지역의 한 샘물 근처에서 쉬고 있다. 성모의 주위에는 작은 천사 들이 모여 있고 한 천사는 아기 예수에게 딸기를 주고 있다. 또 다른 천사는 조개껍질에 물을 담아 오고 있고 나머지 천사들은 앉아서 피리와 플루트를 연주하여 지친 피난민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이 시적인 구상은 로흐너의 목가적인 미술 정신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크라나흐는 말년에 유행을 따르는 작센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마틴 루터와의 친분에 도움을 받아 명성을 얻었다. 그 시기 그가 도나우 지역에 잠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알프스 지역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게 할 수 있었다.
'미술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의 미술-18세기 (0) | 2022.07.13 |
---|---|
네덜란드의 미술-17세기 (0) | 2022.07.12 |
북부 이탈리아의 미술-16세기 초 (0) | 2022.07.11 |
이슬람과 중국의 미술 (0) | 2022.07.09 |
원시 미술 (0) | 2022.07.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