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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

서양미술의 역사-중세 미술

by 매일나 2022. 6. 22.

예언자들-아우크스부르크 대성당

중세 미술

 서양 철학사에서 중세의 시기 구분은 313년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 르네상스 이전까지 대략 1천 년의 기간을 포괄한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박해받던 시대의 기독교 미술은 카타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지하 무덤이자 비밀 예배 장소였던 카타콤에는 벽화와 석관 조각 등이 남아 있다.

 

 카타콤 회화 초기에는 십자가 형태의 닻과 돛대, 예수를 의미하는 물고기, 포도와 종려나무, 양이나 비둘기와 같이 기독교를 상징하는 도상을 그렸다. 그러다 점차 교리가 복잡해지면서 상징물 묘사를 넘어 이야기가 도입된다. 3세기경에 이르면 예수 그림이 많아진다. 

 카타콤 벽화의 소박한 표현은 초기 중세 기독교 미술의 민중적 성격을 반영한다.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로마나 지중해 지역의 하층민이었다. 대규모 재정을 동원하여 거대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궁정과 귀족의 예술과는 달리 거칠고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카타콤 벽화는 사실성보다는 상징성, 추상성이 강하다. 사실성 무시는 종교 탄압의 영향만은 아니다. 기독교 자체가 순간에 불과한 지상의 삶보다 종교적, 정신적 영역을 중시했기 때문에 현실 재현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또한 우상 숭배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일반적인 인물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예수의 모습도 벽화에 직접 담는 것을 꺼렸다. 

 

 중세 중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신학에 큰 변화가 나타났고, 이는 이시기의 미술에도 반영되었다. 우선 신학의 비중이 이성 쪽으로 좀 더 옮겨졌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대중화되면서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상식적인 내용이 중시됐다. 거기에 더해 단순한 메시지 전달을 넘어 미술 자체로서의 형식적 완결성이 강화됐다. 전달 내용을 정확히 알게 하고, 나아가 마음이 움직이도록 감동까지 이끌어 내려면 기능적인 발전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이나 사물 묘사는 회화적 완결성에 역점을 둔다. 예수나 성 프란체스코의 얼굴은 성스러운 분위기만을 풍기던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세부 형태나 명암을 통해 인체의 특성을 최대한 구현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더불어 자연 묘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중세 초기에 자연은 이야기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형식적으로 묘사하거나 아예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토의 그림에서는 자연이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우선 색과 명암으로 산의 굴곡을 표현하고 바위의 질감이 느껴지도록 했다. 또한 앞산은 비교적 상세하게, 뒷산은 흐릿하게 표현하여 원근감을 강조했다. 나무도 세부 묘사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아직 엉성하기는 하다. 집과 나무가 멀든 가깝든 거리에 상관없이 같은 크기이고, 산꼭대기의 나무조차 나뭇잎이 하나하나 보이는 묘사는 원근법을 벗어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330년 비잔틴에 수도를 건설한 후 기독교 미술은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기독교가 통치 이데올로기와 접목되고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지위를 얻으면서 기독교 미술 역시 새로운 위상에 맞게 변신한다. 이 시기 미술은 대규모 교회를 치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로마의 모자이크 방식을 도입하여, 색유리로 빛과 색의 향연을 펼친다.

 색유리를 이용한 모자이크는 빛 반사 효과 때문에 신비스러운 분위기 연출에 적합하다. 다양한 색을 내더라도 모든 색은 단일한 빛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절대적 존재로서 신의 단일성을 상징하기에 적합한 표현 방식이다. 깊이, 높이, 넓이와 같은 공간 구성의 물질성을 벗어나 초월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빛에 의한 상징적 효과가 더욱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모자이크는 재현적인 사실주의 경향에서 벗어나 초월적 상징주의를 실현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건축물 규모가 커지면 가까이에서 회화를 감상하기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모자이크는 멀리서 볼 때 빛의 영롱함이 더욱 살아나기 때문에 거대한 건축물에 회화적인 효과를 내는 데 적합하다. 비잔틴 미술에서 꽃을 피운 모자이크는 훗날 한편으로는 필사본 성서를 장식하는 삽화에서 밝고 선명한 색채로, 다른 한편으로는 서유럽 대형 교회를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묘한 빛으로 실현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세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목적이 이야기 설명에 한정되면서 사실적 묘사와 시간과 공간을 둘러싼 합리적 설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에보의 복음서>는 두 가지 측면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먼저 사실적 측면의 허술함이 드러난다. 배경의 집이나 나무는 달랑 몇 개의 선으로 건드려 놓은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얼굴과 인체 묘사에는 신경을 쓴 눈치다. 나름대로 작업에 몰두하는 표정을 다루고자 한 흔적이 보인다.

 

 중세 미술을 전반적인 후퇴기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기능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미학의 반영이라고 봐야 한다. 한번 획득된 기능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 만무하다. 중세 초기와 중기 미술은 외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적 요구에 더 충실했다. 미술에 있어서 아름다움의 기준은 표현의 사실성이 아닌 빛과 색채의 종교적 상징성이었다. 

 그리스 미술이나 근대 미술의 특징인 사실성과 합리성을 아름다움의 절대 기준으로 삼을 이유는 전혀 없다. 이를 근거로 미술의 진보와 후퇴를 논하는 것은 또 하나의 편견이자 오만이다. 오히려 미적 기준으로서의 사실성과 합리성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엄밀하고 정교한 원근법과 명암법은 상상력을 제한하기도 한다. 중세 미술, 아니 모든 시기의 미술, 더 나아가서는 다양한 지역의 미술에 접근할 때 진보와 후퇴, 정상과 비정상,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을 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차이와 다양성의 차원으로 봐야 한다.

 

 개별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식의 중요성은 배경의 사물을 관찰하고 재현하려는 태도로 연결된다. 배경을 무시하고 이야기 전달에 머물렀던 회화와 달리 배경 공간을 세심하게 묘사한다. 이를 위해 비례를 통한 합리적 공간 구성이 평면에서 입체로 나아간다. 기존 비례가 인간의 신체 기관 사이, 사람이나 사물 사이에서 중요도와 무관하게 현실을 반영했다면 중세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입체적 비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중세 후기는 그만큼 전체로서의 인간을 넘어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접근한다. 오직 신을 중심에 놓을 때 인간 개인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개인 간의 차이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기 어렵다. 개인을 주목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음을 나타낸다. 현실의 인간은 어느 한 사람도 같지 않은 고유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에 본격적으로 전개될 인간에 대한 관심의 실마리가 중세 후기부터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재발견'으로 정의되는 르네상스의 특성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세 후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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