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학

영국의 미술-18세기

매일나 2022. 7. 13. 13:11

조슈아 레이놀즈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

영국의 건축

 1700년을 전후해서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신교 국가들은 이러한 바로크 유행에 관심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 영국의 위대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경은 1666년 큰 화재를 입은 런던의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는 로마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바로크 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보로미니의 교회당보다 훨씬 규모가 크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둥근 지붕과 양쪽의 탑이 고대 신전을 떠오르게 한다. 보로미니의 바로크식 탑과 세인트 폴 대성당의 탑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두 탑의 현관의 전체적인 느낌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곡선적인 곳이 없고 운동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강인하고 안정적인 느낌이다. 건축물에 고귀하고 당당함을 주기 위해 사용된 나란히 서 있는 원기둥은 로마의 바로크 양식보다 베르사유 궁전을 모습을 연상시킨다. 

 

 교회가 그랬듯이 성도 비슷한 경향을 따랐다. 영국의 왕정에서도 베르사유와 같은 성을 짓는 데 필요한 큰 자금을 모을 수가 없었고 영국의 귀족들 또한 사치와 종임의 면에서 독일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도시 근교의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대체로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화려함을 배제했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규칙을 전혀 위반하지 않고 고전 건축의 실제적인 법칙을 최대한 충실하게 따르려고 했다. 고전 시대 건축물을 과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측량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다른 건축가들과 장인들에게 표본을 제공해주기 위해 그들의 연구 조사 결과를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저출한 것인데, 이 책은 18세기 영국에서 건축에 관한 모든 기호를 정리하는 최고의 권위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별장을 '팔라디오 식'으로 짓는 것이 유행을 따르는 것이라 여겼다. 

 

영국의 회화

 당시 영국의 상류 사회 사람들은 영국의 화가에게 작품을 의뢰하려고 하지 않았다.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의 이름이 들어 있는 그림을 저택에 걸어 놓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윌리엄 호가스라는 영국의 한 젊은 화가를 분노하게 했다. 호가스는 해외에서 비싸게 사들여 오는 그림을 그린 화가처럼 자신도 훌륭한 화가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지다. 하지만 당시 영국에서는 새로운 미술을 이해해주는 대중이 없었다. 그래서 호가스는 계획적으로 영국 국민의 관심을 끌만 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대중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선함과 악함을 가르칠 교훈적인 내용이 담긴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탕아의 편력>, <잔혹의 네 단계> 등 교화적인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렸는지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림에서 이야기하는 교훈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각 인물의 성격을 얼굴뿐만 아니라 차림새나 행동을 통해서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대가들이 회화에 사용한 방법을 자세히 연구하고 배웠다. 

 

 호가스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서 18세기 영국 상류 사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 경이 탄생했다. 호가스와 다르게 레이놀즈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코레조, 티치아노 등 이탈리아 거장들이 비견될 수 없는 진정한 미술의 모범이라는 것에 동감했다. 레이놀즈는 과거 거장들의 장점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모방하는 것이 미술가들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카라치의 교훈을 받아들였다. 레이놀즈는 훗날 영국 왕립 미술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을 때 연속된 강연을 하면서 아카데믹한 이론을 저술했다. 그는 취향에도 기준이 있고 예술에서도 과거의 권위 있는 작품을 연구할 편리성을 제공한다면 학생들이 이탈리아 회화의 걸작을 연구할 때 올바른 제작 절차를 빠르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이놀즈는 스스로도 지식인이었고, 권력이 있고 부유한 사람들과 동등하게 환영받았다. 그는 역사화의 우월성을 믿었고 영국에서 역사화를 부활시키고자 희망했지만 상류 사회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레이놀즈는 초상화를 그릴 때 모델을 돋보이도록 더 아름답게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모델의 성격과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특별한 요소를 덧붙여 그렸다.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은 이탈리아 출신의 학자인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이다. 이 작품은 친숙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은 하나의 완벽한 기록이며 이 자체로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토머스 게인즈버러는 초상화에 있어서 레이놀즈의 맞수였다. <하버필드 양의 초상>은 게인즈버러가 작은 소녀가 망토의 끈을 매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녀의 행동에서 흥미를 유발하거나 감동적인 것은 하나도 없지만 단순한 행동을 아주 온화하고 예쁘게 표현하고 있다. 레이놀즈와 비교해 보면 인위적인 양식은 배제하고 자연스럽고 순수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뛰어난 붓 솜씨와 예리한 관찰력을 드러낼 수 있는 솔직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은 초상화를 그리고자 했다.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는 모두 넘치는 초상화 주문으로 그들이 정작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레이놀즈는 고대사에 나오는 신화의 장면을 그리는 여유를 원했고, 게인즈버러는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그는 시골을 좋아했고, 실내악을 즐겨 들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그의 풍경화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풍경화는 습작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