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의 역사-이집트 미술
이집트 미술
이집트 미술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해는 상당한 편견을 동반한다. 대중적 편견으로는 이집트 미술을 정치적, 종교적 선전의 영역 내에서만 이해하는 경향이 대표적이다. 피라미드와 함께 이집트의 상징처럼 알려진 형상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 틀 내에서 부조나 벽화에 적합하도록 일정한 변형 정도가 나타난다고 여긴다. 는 파라오의 위세를 화려하게 보여준다. 금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판을 안쪽에서 망치로 두드려 만들었다. 왕의 두건을 쓰고, 나일강의 신 오시리스의 붙임 수염을 부착한 모습이다. 그 밖의 부조나 벽화의 파라오는 이 모습을 평면적으로 재현한 것이고, 신이라면 여기에 각각의 상징이 덧붙여질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대중적 편견이 만들어진 데는 서구의 편향된 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서구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비서구 예술을 열등하게 취급했다. 그리고 이집트 미술에 '불변성'의 딱지를 붙였다. 수천 년 동안 동일 양식이 변화 없이 반복되었다는 식이다. '정면성'도 대표적인 불변의 근거로 사용된다. 이집트인들에게 현실의 생동감은 중요하지 않았고, 사후 세계의 영원한 삶을 표현하기 위해 인체의 평형과 부동성에 역점을 둔 결과 인체의 중앙선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는 정면성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정면성'과 '혼합성'을 이집트 고유의 특징으로 규정하고 불변성 딱지를 붙이는 것은 부당하다. 먼저 환조의 정면성 부여는 메소포타미아는 물론이고 그리스 미술에서도 상당 기간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심지어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00년경까지도 엄격한 부동자세의 좌우 대칭이 이어져서 더 오랜 기간 정면성의 지배를 받았다.
부조에서의 측면과 정면의 혼합도 공통적인 현상이다. 한참 후에 만들어진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들도 기본적으로 얼굴이나 발은 측면으로 가슴은 살짝 틀어 정면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했다. 부조는 평면에 대상의 특징을 최대한 전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보이는 대로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측면과 정면의 장점을 각각 결합하여 살리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얼굴이나 손발은 측면을 묘사할 때, 그에 비해 가슴은 정면을 묘사해야 신체의 특성이나 동작이 잘 살아난다. 여러 시점이 주는 일반적인 효과 때문이지 이집트의 고유성이나 불변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집트 예술가들은 같은 시대 어느 지역보다도 발달된,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묘사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왜 불변성이라는 편견에 시달릴 정도로 단순화,정형화 된 표현에 치중했을까? 이는 수메르 미술이 그러했듯이 기술적 한계나 막연한 보수성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정치적 기능성 때문이었다. 파라오는 신의 권위를 체현한 절대적 존재였고, 미술은 파라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므로 현세의 생생함보다는 추상적 묘사를 통해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는 기능적 목적이 지배적이었다.
이집트 양식이 3000년 동안 반복되어 불변의 법칙 안에 있다는 편견은 파라오나 신으로 제한하면 부분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이집트만의 특성이라기보다는 고대 미술의 일반적 경향에 가깝고, 또한 이집트 내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제한적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이집트 미술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부당하게 비서구의 사고방식이나 표현 방식을 비합리성과 열등함으로 규정하는 논리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다른 어떤 지역보다 앞서 있던 이집트 미술의 성취와 다양성에 주목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의 여러 시대, 상이한 목적과 기능을 지닌 벽화나 조각 등에 폭넓게 접근할 때 다양성과 자유로움을 만날 기회가 확대된다. 이집트 미술은 시대나 화가, 혹은 묘사 대상과 목적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난다. 또한 동일한 그림 안에서도 양식화 경향과 양식을 넘어 자유로운 표현으로 나아가려는 경향 사이의 날카로운 긴장이 나타나기도 한다.
인물이 전통적인 틀을 담고 있다면 배경은 보다 자유로운 욕구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회화에서 사람 이외의 사물은 지극히 형식적으로 처리하던 것과 달리 자연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나의 사물도 다양한 변형을 통해 흥미로운 느낌을 전달한다. 주위의 새와 물고기, 고양이와 나비, 그리고 식물은 각각의 종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사실적이다. 다양하고 섬세한 색조의 선택도 인상적이다.
이집트 예술가들의 사실적인 표현력은 오래전부터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기원전 2686~2181년에 해당하는 고왕국 시대의 서기 좌상이나 파라오, 혹은 귀족의 조각상을 보면 현대인 입장에서 볼 때도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온다.
기원전 1550~1295년 신왕국 시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던 <아크나톤>은 또 다른 성취를 상징한다. 아크나톤은 '아톤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백성이 믿는 각 지역의 신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고 태양신만을 숭배하도록 했다. 태양신을 만물의 창조주로 규정함으로써 귀족의 종교적 기반인 지방의 신을 넘어서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신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다. 예술적인 면에서 신을 동물이나 사람 모습에서 벗어나 원과 선이라는 추상적 상징으로 묘사한 대신, 인물은 실제의 모습 그대로를 담아내려 했다.
아크나톤 시대를 거치면서 이집트 미술이 내용과 형식 양 측면에 걸쳐서 일대 혁신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이미 고왕국 시대의 정교한 얼굴이나 살집이 접힌 배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평민이기 때문에 가능한 묘사 방법이고 파라오의 경우는 개인 특성을 제거하고 그거 왕이라는 권위만 부였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이 역시 그리 설득력은 없다.
개인의 집이나 무덤을 장식한 미술에서는 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아크나톤 시대 이전에도 신전이나 왕궁의 도식화된 특징과는 달리 개인의 집이나 무덤을 장식한 조각과 회화는 소재나 표현에 있어서 훨씬 더 자유롭고 사실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관의 엄격한 감독 아래 작업을 해야 했던 공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예술가 각자의 개성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 제작되었다.